일본은 과거 백제로부터 많은 문화를 전파 받았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 일본이 왜 백제부흥운동에 대해서 발벗고 나섰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제부흥운동의 의미와 백강구 전쟁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서도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백제부흥운동의 의미
찬란한 문화를 자랑했던 백제는 660년에 13만 명의 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나당 연합군이란 신라와 당이 뜻을 같이한 군대를 뜻합니다. 이렇게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힘없이 무너지자, 백제의 유민들은 나라를 일으켜 세우자는 일념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백제 유민들의 간절한 바람과 활발한 운동 덕분인지 나라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류성을 수도로 하는 '백제부흥국'이 다시 한반도에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라와 당나라는 2차 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킬 준비를 하였습니다. 663년, 마침내 백제부흥 세력과 나당 연합군은 한반도 서남해 백강(지금의 동진강)에서 맞붙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을 '백강구 전쟁'이라고 하는데, 이는 백제와 일본, 신라와 당나라가 참전한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전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일본, 엄청난 규모의 군대를 백제에 파병하다
백강구 전쟁에서 나당 연합군과 백제부흥군은 대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이 이 전쟁에서 백제를 돕기 위해 대규모의 군대와 전함을 보냈다는 점입니다. 당시 일본은 완전히 통일되지 않은 상태여서 매우 혼란스러웠을 텐데도, 무리를 해 가면서 백제에 힘을 보태 주었습니다. 일본 천황은 660년에 백제가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바로 군대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파병 준비를 위해 항구인 난파궁으로 옮긴 후, 직접 후쿠오카까지 오가며 파병 준비를 했습니다. 이런 행위는 사실상 수도를 옮기는 '천도'나 다름 없는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파병을 준비한지 2년 5개월 만에, 일본은 무려 1천 척의 배와 2만7천여 명의 군사를 백제로 보냈습니다. 당시 일본의 총 인구수가 500만 명임을 감안한다면 일본의 백제 파병은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일본은 왜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백강구 전쟁에 참여했을까?
일본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남의 나라의 일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를 두고 우리 나라와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일본 사학계가 이 전쟁을 한반도를 집어삼키기 위한 일본의 야심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라 주장한 데 반해, 우리 나라 사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일본의 오카야마 현 길비 군에는 제명천황이 백강구 전쟁에 동원할 병사 2만 7천 명을 얻었다 해서 붙여진 '니만향'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신사에는 백제신 유물과 축성술을 엿볼 수 있을 것들이 많습니다. 이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백제 유민이 남긴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8세기까지 일본 인구 70~80%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주민과 그 훈손들이었다는 논문이 일본인에 의해 발표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따르면 제명천황의 남편인 서명천황은 백제궁과 백제대사를 지었고, 고대 일본의 주요 성씨들의 출신을 분석한 <신찬성씨록>에는 서명천황의 할아버지인 민달천황이 백제왕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근거들로 미루어 일본의 천황이 백제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전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