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에는 골품제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골품제의 의미와 장보고가 세운 청해진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세워서 바다를 지켰는데 청해진의 역할과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도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골품제란?
신라는 제17대 내물왕 이후에는 왕위를 세습하여 왕권을 강화하면서 '골품제'라는 엄격한 신분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골품제는 모든 사람을 왕족인 성골과 진골, 관료가 될 수 있는 상급 계급인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에 속하는 하위 계층인 3두품, 2두품, 1두품으로 나누어 차별을 두었습니다. 성골은 부모가 모두 왕족인 사람을 말하였으며, 진골은 부모 중 어느 한 쪽이라도 왕족이 아닌 혈통이 섞인 자손을 말합니다. 신라 시대에는 이처럼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관직 진출, 혼인, 의복, 가옥 등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철저히 규제를 하였습니다.
청해진은 어떤 곳인가?
우리 나라의 해상 무역 발달을 잘 보여 주는 청해진은 통일신라 흥덕왕 때, 장보고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 일본과 무역을 하던 곳입니다. 이곳을 세운 장보고는 어릴 때 당나라의 쉬저우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 되었습니ㅏㄷ. 어느 날, 그는 신라에서 잡혀와 노비가 된 동포들의 참상을 보고 신라로 귀국하여 해적들의 인신매매 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청해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습니다. 흥덕왕은 흔쾌히 승낙하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에 임명하였습니다. 이에 장보고는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청해제 진을 설치하는 한편,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무역의 주동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후 청해진은 중국과 신라, 일본의 중계무역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중개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무역꾼들
신라는 삼국 통일로 인해 각지의 상품 유통이 활발하게 되어 산업이 발달하고, 695년에 수도 경주에는 두 개의 시장이 생겨 교역이 증진되었습니다. 여기에 당나라와의 해상 교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자, 당나라의 발달된 문화와 경제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동부, 신라 그리고 일본 사이의 무역은 대부분 신라 출신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신라의 무역꾼들은 유럽 지중해 연안에서 상인들이 해낸 것과 같은 중개적인 역할을 수행해 나갔습니다. 신라의 해상 무역을 대표하는 장보고 세력은 세계 무역의 동쪽 끝인 동아시아 지역을 담당하여 무역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신라방은 어떤 곳일까?
삼국통일 후 신라는 대외 무역을 활발하게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해외로 진출하는 신라인들이 늘어났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신라의 무역 상대국이었던 당나라의 해안지대에는 신라 사람들이 머물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신라 사람들의 집단 거주지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라방입니다. 신라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사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이 가장 많았고 승려들도 많았습니다. 산둥 성에 있던 법화원이라는 신라인의 절에는 승려가 250명씩 몰려든 때가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등주에는 신라의 사신, 유학승을 유숙시키고 접대하기 위해 신라관을 설치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신라방의 거류민을 다스리기 위해 자치적 행정기관으로 신라소를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신라방은 이후 장보고가 해상무역을 장악하면서 더욱 번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