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보상의 역할과 이름의 역사 그리고 보부상이 되었던 이유

부보상의 역할과 이름의 역사 그리고 보부상이 되었던 이유

   우리나라에는 과거부터 부보상이라고 하는 떠돌이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역할과 부보상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부보상과 보부상의 관계를 알아보겠습니다.


부보상의 역할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된 부보상의 활동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에 떠돌아 다니는 정보를 움켜쥔 첨단의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마을에 몇 명이 거주하며 누가 살고 있고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군데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생활을 연결시켰던 소식통들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들을 '보부상'이라고 부르는데 보부상은 틀린 말입니다. 보부상이 아니라 '부보상'이 맞는 말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하사한 이름

  부보상은 부상과 보상이 합쳐진 말입니다. 부상은 물건을 지게에 지고 팔러 다니던 남자행상(짐장수)을 가리키고 보상은 물건을 보자기에 싸서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팔러 다니던 여자행상(봇짐 장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부보상'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행상들에게 하사한 고유명사입니다. 고려 시대 때 장군이었던 이성계는 1364년에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 때 위험에 처한 이성계를 백달원이라는 행상이 구출해 주었습니다.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운 후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백달원에게 소원 한 가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백달원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비는 대신 행상들을 보호해 주고 지원해달라는 소원을 말했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부보상'이라는 명칭을 행상들에게 내리고, 상업을 중요시 여기게 했습니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먹을거리 등 식생활과 관련된 것을 지게에 지고 다니던 부상이, 여성 장식품을 봇짐에 싸가지고 다니던 보상보다 먼저 생겼으니 순서로 봐서도 부보상이 맞는 말입니다.


부보상이 보부상이 된 까닭

  그럼 고유명사인 부보상이 어떤 보부상으로 둔갑을 했던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그 연유를 찾기 위해서는 일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의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는 부보상이란 용어를 남존여비의 관념으로 왜곡시켰습니다. 즉 남자인 부상이란 말 대신 여자를 뜻하는 보상을 앞에 두고 여성 해방과 연결지어서 우리 민족의 내부 분열을 부채질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조선총독부는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부보상을 보부상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사농공상(무사, 농부, 장인, 상인)의 일본식 서열개념을 이용해 상업을 중시하는 조선 왕조의 중상 정책을 깍아내리려는 의도에서 보부상이라 했습니다. 또한 일제의 식민정책에 최후까지 반항한 부보상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술책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들이 밝혀지면서 최근에는 보부상이 아닌 우리 민족의 고유명사인 '부보상'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부보상 되찾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