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휘어잡은 로스차일드 가의 힘

 

유럽을 휘어잡은 로스차일드 가의 힘

  로스차일드가는 어디서 한번은 들어본 유명한 명문가의 한 가문입니다. 로스차일드가문이 어떻게 유럽의 명문가문이 되었는지 알아보고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기존 명문가문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우리도 명문가문을 만들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돈으로 유럽을 휘어잡은 로스차일드 가

  로스차일드 가문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금융업자 가문입니다. 원래 발은 '로트실트'로, 로스차일드는 영국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이 가문은 전 유럽을 돈으로 휘어잡은 거부 유대인 집안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 가문을 크게 일으킨 사람은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입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게토 출신으로, 고리대금업으로 출발하여 거금을 모아 로트실트, 즉 로스차일드 은행을 설립하였습니다. 그 후 빈, 런던, 파리 나폴리 등지에 지점을 개설하고 아들들을 지점장으로 보내어, 전 유럽을 잇는 금융 네터워크를 구축했습니다. 또한 각국 정부, 권력층과 가까이 지내며 정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유럽에서 큰 전쟁이 있을 때마다 로스차이들의 돈은 중요한 역할을 하여, 그의 돈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유럽의 역사가 뒤바뀌곤 했습니다.


영국 왕실보다 승전보를 먼저 알리다

  1815년 6월 19일 늦은 오후, 유럽 5개국을 거점으로 국제 비즈니스를 하고 있던 로스차일드 가의 직원 로스워드는, 벨기에 서부의 오스텐드 항에서 영국을 향해 떠나는 배에 급히 몸을 실었습니다. 그는 손에 막 인쇄된 네덜란드 신문 한 부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배는 다음 날 이른 새벽, 영국의 포크스톤 항에 도착했습니다. 항구에는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셋째 아들인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스워드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네이선에게 신문을 건넸습니다. 신문에는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이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 군을 물리쳤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네이선은 곧장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승전보를 왕실에 보고했는데, 이는 역국군보다 빠른 보고였습니다. 네이선은 보고를 마친 후 증권시장으로 직행했습니다. 큰손으로 알려진 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집중되었습니다. 네이선은 국채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투자자들도 그를 따라서 보유 국채를 팔았습니다. 네이선은 계속 국채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증권시장 안에는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이 프랑스 군에게 패배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순식간에 증권시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국채 가격은 크게 폭락했습니다. 네이선은 폭락한 국채를 모두 사들였습니다. 잠시 후 승전보가 도착했고, 국채는 다시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이렇듯 로스차일드 가는 자신들의 유럽 정보망을 가동시켜, 영국 국채 가격 조작으로 횡재를 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로스차일드 가는 1875년 수에즈 운하 건설에도 돈을 빌려 주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영국 정부에 돈으로 압력을 넣어, 유대 인 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밸푸어 선언을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뒤 로스차일드는 이스라엔 건국에도 거액을 빌려 주었을뿐더러 동유럽과 남미에도 진출하여 세계 금융시장과 산업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