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발전을 이끈 메디치 가문 소개와 발전 그리고 몰락

 

이탈리아의 발전을 이끈 메디치 가문 소개와 발전 그리고 몰락

  이탈리아에는 메디치 가문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역사적으로 큰 활동을 했던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가문이 어떻게 이탈리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메디치 가문이란?

  르네상스 시대 미술계 3대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군주론>을 지은 마키아벨리, 지동설을 확신한 과학자 갈릴레이가 잇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탈리아의 명가인 메디치 가의 보호와 후원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종교재판에서 근신 명령을 받은 후 여생을 메디치 가의 보호 속에서 보낸 갈리레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새로 발견한 목성의 위성에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메디치 가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문 가문으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메디치 가는 당시 유럽 굴지의 금융업자로서 또 피렌체 공화국과 토스카나공국의 지배자로도 유명합니다. 이 가문은 원래 피렌체 동북의 무젤로 지방 출신인데, 상업으로 성공하여 14세기부터  피렌체의 정치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처옴피의 폭동(1378~1382) 때 이 가문의 한 사람인 살베스트로는 민중 편에 가담하여 지배층에 대한 공격에 앞장서서 민중들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얼마 후 조반니 디 비치는 상업과 교황청의 은행가로서 거금을 모으자 이를 발판으로 정치계에 등장하여 활약하였습니다.


메디치 가, 이탈리아의 중심에 서다

  조반니 디 비치의 아들인 코시모 데 베디치는 이전의 지배층과 대립하여 수년동안 피렌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 뒤 코시모 데 메디치는 민중의 지지와 상업 자본에 힘입어 정구너을 장악하여 피렌체 공화국의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유럽의 16개 도시에 은행을 세우는 한편, 교황청에 재정을 장악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시의 행정에 투입하고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고 장려하는 데 썼습니다. 피렌체와 메디치 가의 번영은 코시모 데 메디치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 때에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외교 수완 덕분에 피렌체는 이탈리아 정치의 중추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피렌체의 르네상스 문화가 최고조에 이른 것이 바로 이 때입니다. 그는 르네상스의 중심 사상인 인문주의적 교양을 폭넓게 지녀 학문과 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철한 연구를 장려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피에로는 무능하여 프랑스의 왕 샤를 8세의 침입을 받자 이에 굴복하였습니다. 이에 시민들은 반발하였고, 결국 피에르는 추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에디치 가의 몰락

  그 후, 메디치 가는 1512년 피렌체로 복귀하여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를 배출하였습니다. 하지만 메디치 가는 교황 레오 10세가 면죄부를 팔아 종교개혁을 초래하자 잠시 피렌체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 후 메디치 가는 독일의 황제 카를 5세가 남하하여 로마를 약탈했을 때, 황제의 힘을 빌려 복귀하였습니다. 가문을 이은 먼 친척인 코시모 1세가 1569년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는 과중한 세금을 거둬들여 경제를 거의 파탄지경에 몰고 갔으나, 예술과 과학의 후원자로서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코시모 1세의 딸 마리아 데 메디치 때부터 데이치 가는 꾸준히 유럽의 군주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 후 차차 세력이 쇠퇴하여 1737년 7대째의 대공 잔가스토네의 죽음으로 혈통이 끊겨 메디치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